뭘 하지? 라는 고민보다는 해야하는데 라는 고민을 더 많이 한지가 현저히 지났고
그 결과의 다수는 만족스럽지 않다.
그렇다고 나는 실패했다고 부르짖는 건 아니고
그냥 현상을 관찰헀을 때 그렇다.
기대감이라는 감정으로 먹고 살던 사람이
왜 모든 것을 피하려고 하는 사람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집중력을 잃었다.
기본적인 인지기능은 약해졌는데 메타인지만 강하다.
나는 호소하기가 어려워졌다.
호소하는 내가 보여서 호소되지가 않는다.
행동엔 생각이 따르면 안된다.
하지만 생각이라는 행동에 중독된 것 같다.
애석한 부분이다.
나는 나를 감독하지만 감독의 결과는 좋지 않다.
감독이 질서보다 혼돈을 가져오면
감독의 비용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부정적인 면만을 보려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상황이 긍정적이지만도 않다.
강박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느낀다.
그런 강박적인 나를 인식하는 것조차 강박적이다.
나는 무엇이 두려운 것일까?
두려움이 원인은 맞을까?
이전에 하고 싶었던 것들은 이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친구를 만나도 어색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점들은 또래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고도 보인다.
특별히 나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딱히 과거의 꿈을 좇을 필요도 없다.
그건 그 때의 시야에서 생각하고 기대한 것일뿐 지금 상황과 그때의 상황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꿈은 늘 현재상태에서 다시 꿀 수 있으며
상황에 따라 언제나 변경 가능한 것이라고 본다.
어떻게 보면 못이룬 꿈에 대해 별로 아쉬워할 이유도 없다.
꿈은 이루는 것보다 꾸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다.
꿈을 꿀 수 있는 능력은 기대감을 가질 수 있는 능력과 결부된다.
기대감은 감정을 고조시키고, 삶의 의욕을 증진해준다.
그런 기대감을 조절하는 것은 현실감이다.
현실적인 조건 하에서 기대의 실현가능성이 판단되기 때문이다.
기대가 좌절되면 감정은 부정적으로 변하고, 삶의 의욕이 저하된다.
따라서 인간은 현실감을 통해 기대를 측정하고 좌절될 기대는 미리 하지 않도록 학습한다.
어린아이들의 현실감각은 미숙하다.
쉽게 기대감을 가지고, 꿈꾸는 능력도 상당하다.
나루토를 보면 자신도 닌자가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원피스를 보면 자신도 대해적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이들은 언젠가 자신이 닌자가 될 수 없음을 알고 좌절하는가?
그렇지 않다. 애초에 그런것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들은 꿈을 꾸느라 바빠서
실현가능성에 대한 판단은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현실감각이라는 것은 자동적으로 부여되는 것이라
어른이 되면 이내 허구라는 것을 깨닫고 그런 꿈은 꾸지 않는다.
하지만 어린이들에게는 자신의 꿈과 기대감에 현실감각이 끼어들 수 없기 때문에 (발달되지 않았으므로)
기본적인 삶의 태도에 있어 고조된 감정과 높은 삶의 의욕이라는 혜택을 얻는다.
더구나 아이들은 산타가 없는 것을 알았다고 해도 슬퍼하지만은 않는다.
왜냐면 현실감각을 키우고 어른이 되는것조차 아이들에게는 꿈이기 때문이다.
어른들에게는 아이들에 비해서는 별로 기대할 것이 남아있지 않다.
실현가능성이 없는 기대는 발달된 현실감각에 의해 미리 제거되었다.
제거된 기대는 꿈꿀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꿀 꿈의 선택지가 줄다보니 꿈을 꾸는 능력이 저하될 수 밖에 없다.
무서운 부분은, 꿈의 선택지가 줄다보니
꿈 하나만 보고 살게 되는 경우이다.
꿈은 이루지 못할 수도 있지만
오랫동안 하나만 본 꿈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 타격은 크다.
이럴때 환기가 필요하다.
꿈은 이루는 것보다 꾸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말이다.
최소한 당시의 현실감각이 그 꿈을 걸러내지 못했기에
그동안 기대감과 고양된 감정을 가지고 살 수 있었다.
만약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이 확실하다면
현실감각이 걸러내지 못하고 있는 새로운 꿈을 찾는 것이 어떨까?
의식주만으로 만족을 못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면
인간은 꿈을 먹고 산다는 말이 정말 맞는 것 같다.
꿈을 이루는 것에 집중한다면
실패가 두려워 아무 꿈도 꾸지 않게 될수가 있겠다.
하지만 꿈이 없는 삶은 정말 공허할 것이다.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가장 최악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우울증의 부분집합이라고 생각된다.
위 분석에 따른다면, 정말 즐겁고 고양된 감정을 가지고 사는 것이란
꿈을 꾸면서 그 꿈의 방향대로 살고, 성공여부는 신경쓰지 않는 것으로 귀결되는 듯하다.
잘 생각해보면 정말 행복하게 산다고 보이는 사람은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다.
이들은 하고 싶은 것을 시도해보고 여러 꿈과 기대를 가지고 살면서도
매사 실패여부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쿨하기까지 하다.
현실감각은 어차피 인간이 죽을때까지 완벽하지 않고 오류투성이이다.
그렇기에 늙어죽을 때까지 인간은 꿈을 꿀수 있고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현실감각이 간과하는 선에서 (간과한다고 해서 이루지 못할 꿈이라는 것도 아니지만, 어차피 이루고 말고는 상관없기 때문에 신경쓸 이유가 없고, 신경쓴다 하더라도 최대한의 현실감각이 가능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꿈의 대상으로서 기능이 가능하다) 꿈을 설정하고 그걸 인식하며 살아가는 것이 안정적인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든 좌절하든 다시 다른 꿈으로 넘어가서 2막, 3막의 삶을 사는 것이다.
구소련 시절 억울하게 정치범으로 몰려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11년의 세월을 보낸 알렉산드로 솔제니친의 저서 수용소 군도를 보면 최악의 상황에서조차 놀라운 인간의 꿈꾸는 능력을 엿볼 수 있다.
수용소에서의 삶은 자유가 없고 고통과 절망뿐이다.
끔찍하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희망이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희망따윈 없다.
말하고 싶은 것은 꿈을 꾸는 것은 젊었든 늙었든 상태와는 무관하게 발휘되는 인간의 본능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꿈을 꾼다는 인간의 본능이 발휘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꿈을 희망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다.
희망은 무언가 이뤄질 수 있을 것에 대한 기대감이지만, 꿈은 이뤄지고 말고의 이전에 기초적인 삶의 연료이다.
더구나 꿈은 철저하게 현실감각의 통제 하에 도출된 기대감이다.
신앙적인 것이나 허구적인 것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 이를 구분하는 것은 중요할 것이다.
현실감이 부족해도 괜찮다!
현실감각은 꿈에 따라 행동하면서 자동적으로 길러질 것이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현실감각은 어차피 완벽할 수 없다.
그러니 그냥 당신의 현실감각을 믿어라! 그걸 믿고 꿈을 꿔라. 나머지는 현실감각이 알아서 할 일이다.
꿈에 대한 분석은 이정도까지만 하고 이제 다시 나의 삶을 진단해본다.
돌아보니 나는 꿈을 꾸는 것을 두려워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루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꿈꾸기를 유보하고,
유보된 꿈 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정체가 되고 있었다.
방향이 정해지지 않으니 정리되야 할 것이 정리되지 않는다.
기대감이 없으니 삶이 무기력하고 두려움만이 남아 좇긴다.
분명 나의 현실감각이 지적하지 않는 꿈이 존재할 것이다.
그것을 탐색하고, 실현에 신경쓰지 않되 방향에 따라 살면 고양감을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워하지 말자.
두려움 없이 꿈꾸고 행동하자.
릴레이하듯, 계속해서 꿈꾸는 것이 중요하다.
실패한 꿈과 성공한 꿈의 가치는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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