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적록색약이 있다.
빨간계열과 녹색계열의 빛을 받았을 때 색구분 정도가 평균보다 낮다는 것이다.
색약의 인구비율은 국내 5.9%라고 한다.
이정도면 꽤나 높은 수치다.
20명 모이면 그중 한명 이상은 색약이라는 얘기다.
색약은 색맹과는 다르다.
색약은 일정 수준의 차이만 있으면 적색과 녹색을 구분할 수 있다.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세상 역시 다채롭다.
그런데 색약도 등급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정도에 따라 강도, 중등도, 약도로 나뉜다.
그리고 정밀검사결과 나는 강도였다. (robber 아님ㅎ)
적록색약자가 일상생활에는 딱히 지장이 없다고 하는데,
사실 강도쯤 되면 지장이 있다.
내가 강도 색약으로서 가장 싫은 부분은 고기를 못 굽는다는 거다.
나는 생고기와 익은 고기를 구분한다.
익은 고기와 탄 고기도 구분한다.
그런데 덜익은 고기와 익은 고기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높으신 분들과 고깃집에 가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그런 자리에서는 내가 고기를 굽게 되지만,
나는 고기가 익었는지 알지 못해서 내가 잘 뒤집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냥 굽는다.
그게 아니면 그냥 탄 고기 하나쯤 나오면 대충 다 익었다고 판단한다.
이럴 때면 덤벙대거나 그냥 귀하게만 큰 자식으로 보일까봐 항상 신경 쓰인다.
가족들이나 친구들이랑 고기를 먹으면 안익은 거 가져간다고 말도 많이 듣는다.
또 한가지는 옷 색깔 배치를 잘 못하겠다는 거다.
대학교 시절 옷에 관심이 생기면서 안 사실이지만 난 정말 색을 못 본다.
카키나 포레스트색을 회색으로 보고, 연한 갈색을 녹색으로, 어떨 때는 회색을 녹색으로 본다.
작년에는 회색으로 알고 있던 숏패딩을 자주 입고 다녔는데,
벗을 때가 되어서야 지인이 그것은 민트색이라고 일러주었다.
최근들어 안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은행나무가 항상 노란색이 아니라는 거다.
난 항상 노란색인줄 알았는데, 원래는 초록색이었다가 노란색으로 단풍이 든다는 걸 알고
문득 내가 못보고 있는게 엄청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도 그랬다.
나는 미술을 좋아했지만 채색은 좋아하지 않았다.
살색과 연한 초록색을 구분 못해서 자주 슈렉을 만들곤 했다.
또 연두색과 노란색을 구분하는 것이 정말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더구나 물감을 섞어서 색을 만드는 수업이 종종 있었는데
그냥 내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수업을 들었다.
또 많이 불편한 점은 발표자료나 강의자료를 볼 때이다.
종종 중요한 문장이나 단어를 빨간색으로 해놓고 수업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난 유독 화면에 있는 검은 글자와 빨간 글자를 구분하지 못한다.
검은 글자 속에 빨간 글자가 섞여 있으면, 그냥 다 검정 글자로 보인다.
그래서 그런 글자들을 오가면서 설명할 때는 도대체 어딜 읽고 있는건지 헤맨 적이 자주 있었다.
논문 볼때도 그래프 색들이 구분 잘 안될 때가 많다.
나는 아마 빨간색 원추세포가 많이 부족한 것 같다.
쓰다보니 색약은 개불편하다.
색으로 하는 의사소통이나 공감은 원색이 아닌 이상 거의 잘 안된다고 보면 된다.
난 어렸을때부터 경찰을 좋아했지만 색약은 제도적으로 경찰도 될 수 없다.
근데 나는 진짜 경찰을 하면 색약땜에 좀 문제될 것 같아서 이건 인정이다.
강도 색약은 그렇다는 거지 중증도나 약도까지 못할 필요가 있는지는 안 되어봐서 잘 모르겠다.
아무튼 색약으로 태어나지 말자.
그래도 색약 정도면 행운이다.
몸 불편한 것 중에 색약이 젤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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