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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닛메이드 남성

경험/에피소드

by Aesthetic Thinker 2020. 2. 11.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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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 첫 출근이었다.

그러니까 대학원에 합격하고 첫 연구실 방문이었다.

학부 때 두 곳의 연구실 생활을 한 적이 있기에

연구실의 분위기 파악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기며 문을 열었다.

 

파티션이 없는 오픈형 랩실이었다.

방장님께 간단히 소개를 하고 설명을 들었다.

출퇴근은 자유였다.

과거 두 곳의 연구실에서는 매일매일 썩어가는묶여있는 선배님들을 보아왔기에

자율 출퇴근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내 이 자유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외국 기업 문화에 대한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떨어질 사람은 서서히 떨어져 나간다"

 

다시 말해서 할 사람은 결국 자기가 알아서 한다는 것인데,

한마디로 개인주의 실력파 연구실이라는 거다.

 

인원이 약 40명이나 되는 연구실은 분명

그 자율성 강한 분위기 속에서도 해이해지지 않고

오히려 각자의 자율이 빛을 발하여

자체적으로 훌륭하게 운용되고 있었다.

 

반대로 일원이 되지 못한 몇몇 연구생들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자율적으로 이 연구실의 일원이 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나 첫날에는 장소 자체가 처음이라 적응이 안되기도 하고

특히 학비 마련 걱정에 정신이 팔려

선배 연구원분들에게 나 자신을 소개하는 것을 소홀히 하고 말았다.

 

선배님들은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신입 받아라ㅡ" 따위는 없다.

안면을 터야 할 사람들 사이에서 안면이 트지 않은 채 공부하는 것은 죽을 맛이었다.

혹시나 내가 '예의 없는 놈'으로 비춰지지는 않을까 좌불안석이었다.

그렇다고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한 분 한 분씩 찾아가서 자기소개를 하다가는

'별난 놈'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평소 낯을 많이 가리는 탓에 그럴 용기도 없었다.

아까는 그냥 앉아있었으면서 이제와서 갑자기 인사하는 것도 이상했다.

결국 그날은 처음 설명들은 선배님을 제외하고는

아무와도 일면식을 하지 못한 채 퇴근했다.

 

퇴근 후 친구를 만나 생맥주를 마시며 이런 고민을 털어놓았다.

친구는 무조건 다음날에 한 명 한 명씩 자리를 찾아가서 인사하라고 조언했다.

한 술 더 떠서 미닛메이드라도 돌리면서 하라고 말이다.

사실 연구실 분위기상 미닛메이드는 조금 오바였다.

게다가 나에게는 이런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소심 대장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며칠을 계속 그런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공부하는 게 더 힘들 것 같았다.

차라리 한 번에 어색을 깰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래.. 이건 나를 위한 일이었다.

맥주 500cc의 힘을 빌려 결심했다.

미닛메이드를 돌리겠노라고!

 

포도가 제일 맛있다.

결국 집에 가는 길에 미닛 메이드 한 박스 사서 들어갔다.

나는 잠들기 전까지

머릿속에서 미닛메이드를 돌리는 시뮬레이션을 멈추지 않았다.

 

아침이 되었다.

말끔히 차려입은 뒤 미닛메이드 박스를 들고 연구실로 향했다.

선배님들의 출근시간은 제각각이어서

모두가 모여있기 좋은 때인 점심시간 이후를 노렸다.

 

그런데 아뿔사, 너무 일찍 와버렸다.

선배님들이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기 전에 와버린 것이다.

연구실은 문이 잠겨져 있었다.

그런데 다행히 마침 선배님 한 분이 올라오셔서 문을 열어주셨다.

황금타이밍이었다.

바로 인사를 하면서 미닛메이드를 건네드렸다.

 

"어제는 제가 경황이 없어서 인사를 못드렸네요 "

돌아오는 말씀.

"이런거 아무도 안하는데.. 하하. 아무튼 잘 마실게요."

역시 미닛메이드는 오바였다.

하지만 오히려 그 약간의 오바가 포인트였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거기서 내 이미지가 더 잘 각인되었으리라.

 

선배님은 웃으며 받아주셨고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셨다.

선배님에게 먼저 다가가 일면식을 하고나니

마음이 한결 놓였다.

 

이 기세를 몰아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선배님들께

미닛메이드를 돌려드리며 내 소개도 하고 선배님도 한 분 한 분 알아갔다.

모두 좋게 받아주셨다.

조금씩 연구실의 일원이 되어가고 있었다.

 

평소 먼저 다가가기 어려워하던 나였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먼저 다가가는 맛'까지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는 좀 더 편한 마음으로 먼저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유럽에서 온 외국인 선배님은

가장 큰 목소리와 가장 큰 몸짓, 그리고 가장 어색한 한국말로

기쁘게 소개를 받아주셨다.

어제 영화 기생충을 봤는데 아직 한국어만으로는 보는게 어려웠다고 한다

이 선배님 특유의 액션에 감동한 나머지 나도 덩달아 신나서

"This is my little gift for you..♡"

하면서 되도 않는 영어로 미닛메이드 오렌지를 건네드렸다.

 

오늘의 미닛메이드는 나에게는 큰 용기였다.

붙임성 좋은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일 수도 있겠지만,

워낙 소심한 내가 '다가가는 재미'를 느끼게 된 것은 의미가 크다.

오늘도 스스로에게 외친다.

연구실 생활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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