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라는 말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문구여서 흔히 인용하곤 한다.
보통 책임과 자유라는 두 개념은 서로 상반되는 관계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책임질 것이 많으면 자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드는 생각은 그렇지가 않다.
우선 책임과 자유는 서로 비교될 수 있는 일반적인 속성이 아니다.
내가 책임지고 있는 것들과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들을 잘 생각해보면
한 종류의 책임은 필히 다른 종류의 자유를 보장한다.
가령 아무개씨가 근무하는 회사에서 주기적인 잡일을 하나 맡게 되었다고 해보자.
아무개씨는 그 잡일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되므로 사내에서의 시간적 자유가 조금 줄어들었다.
그러나 아무개씨는 회사 내에서 자기가 맡은 일이 분명해졌으므로
소속감에 대한 자유를 더 누릴 수 있게 되었고, 맡은 일의 존재 덕분에 다른 더 힘든 일로부터 떠맡겨질 위험에서부터, 그리고 필요 없는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한 불안으로부터도 조금 더 자유로워졌다.
잡일을 맡기 전까지 이전에는 모두 책임으로 느껴졌던 것들이다.
마치 물물교환을 하듯 다른 형태의 책임들이(또는 자유들이) 서로 맞바꿔진 것이다.
물물교환에 비유한 이유는, 맞바꾼 책임이 동일가치가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우리가 생각을 잘 해야 하는 부분이다.
우리가 맡은 책임들에 너무 지쳐있을 때, 우리는 '책임의 충동구매자'가 될 우려가 있다.
맞바꿔 가져올 책임의 무게를 너무 과소평가해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누리는 것들 뒤에는 언제나 우리의 책임이 뒷받치고 있다.
책임의 무게에 짓눌려 누리던 것들을 망각하는 순간, 다른 책임들이 너무나 달콤해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막연한 자유를 얻겠다고 현재의 책임을 섣불리 다른 책임과 맞바꾸는 순간부터
우리가 망각했던 자유들은 하나 둘씩 생각지도 못한 형태의 책임들로 우리를 구속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되돌리기 힘든 결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더 잘 알아야 한다.
서로가 느끼는 책임의 무게와 자유의 달콤함은 같은 종류라도 타고난 성향에 따라 상이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더 잘 안다는 것은어떠한 책임을 선택하고 어떠한 자유를 누릴 것인지를 더 잘 배분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도시의 삶에 지쳐 자연인이 되고 싶다는 농담을 자주 듣는다.
확실히 도시는, 돈이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모든 도시인들은 항상 돈이라는 책임에 묶여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모두 알다시피 야생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취업전선에서부터 자유롭지만,
항상 사냥감을 노리고 음식을 찾아다녀야 하며 포식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하고,
지금 시대에는 외롭기까지 하다.
현대사회와 도시문명은 원시시대 때부터 책임들을 맞바꾸며 쌓아올린 거대한 시스템이다.
책임은 형태가 다를 뿐 결코 없을 수 없다.
따라서 현재의 시스템을 비난하기 전에, 왜 이 시스템이 이룩되게 되었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전통과 규율을 부정하기 전에, 왜 그러한 전통과 규율이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이해해 볼 필요가 있다.
현 체제로부터 우리가 얻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의식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울 수 있다.
현 체제의 불완전함으로 인한 피해가 훨씬 더 부각되어 보이기 때문이다.
낡은 체제의 철폐와 새로운 체제의 도입은 우리에게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하는 것 같지만,
그것이 낡은 체제로부터 얻고 있던 것을 망각한 자들의 결정이었다면
더 큰 구멍으로 우리에게 돌아올 수 있다.
인간이란 자신에게 있는 것보다 없는 것들을 더 갈망하고 의식하는 법이다.
지금의 책임을 포기하고 도망치고 싶다면, 도망침으로부터 얻는 자유들을 생각하기 이전에
도망침에 따라 잃게 되는 자유들도 냉정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우리는 어떤 자유를 진정으로 원하는가를 먼저 알고
그것을 기준으로 어떤 책임을 질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Differentiable Programming: Differentiable Indexing? (0) | 2021.06.09 |
---|---|
카카오톡 멀티 프로필 기능에 대한 고찰 (2) | 2021.01.28 |
토마토 없는 햄버거 (2) | 2020.10.09 |
눈깜빡임의 기원 (6) | 2020.03.06 |
형이상학과 메타정보 (2) | 2020.02.21 |
댓글 영역